천 번의 낮과 밤을 지나

규우 @alea_07
2025-11-10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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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사룡장락 1부 엔딩 이후를 기준으로 함.</i>




서늘한 겨울바람에 숨 한 점 실어 보낸다. 축축한 물비린내도 몇 번의 계절을 반복하는 새 옅어져 어느 기묘한 꿈결에서나 겪었던 듯 희미해진 채 또다시 겨울을 밟았다. 습기를 머금은 눈송이가 뺨에 내려앉았다. 발갛게 익은 볼에 한기를 남기며 물방울이 떨어졌다. 양손 가득 식료품이 담긴 봉투를 쥔 채로 포말을 응시하던 청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이 삶도 3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함께 살자는 약속 하나만을 남긴 채로 귀염오와 라하현은 학라와 그곳에 웅크린 어두운 공포로부터 도망쳤다. 황룡회의 추적, 귀씨 가문의 보복, 그 외 사사로운 원한과 여러 이해관계의 난장판 속에서 우여곡절이 없지는 않았지만 끝내 우리는 바다에 다다랐다. 그 싸늘하고도 짙은 소금 내, 낯선 타향의 공기가 어느새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의 정이 붙었다.

옥패를 버린 뒤로 악몽을 꾸는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따금 학라에서의 꿈이 머리맡에 찾아오고는 했지만, 그 기이하고 불길한 존재는 더 이상 눈앞의 미물을 삼키지도, 말을 걸지도 않은 채 관찰하듯 한참을 응시하다 사라질 뿐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불안을 삼키던 아침도 그 주기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무난한 나날이다.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거머쥔 평범함이 스무 해의 경험을 뛰어넘기에는 미약했던 탓에 나고 자라 걸치고 거머쥐었던 전부를 버렸음에도 마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마냥 어색하였다. 불행은 발밑의 그림자와도 같아 때때로 자신이 나태함에 안주하고 있지 않은지, 피붙이와 원수가 칼을 들이대면 받아칠 수 있을지 경각심도 들었지만 아직은 이 태평한 나날이 싫지만은 않았다.

파도 소리를 따라 난 길을 걷기를 수 분,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금자리가 염오를 반겼다. 떠나올 적에 남긴 발자국 위에 켜켜이 눈이 내려앉은 것을 확인하고는 딱 두벌뿐인 열쇠 중 하나를 꽂아 넣는다. 잡음 없이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자, 훈기와 함께 현관 벽에 비스듬히 기댄 인영이 발끝에 닿았다. 시선이 그림자를 쫓는다. 면으로 된 치파오와 그 위에 도톰한 담요를 두르고 비단처럼 광택이 흐르는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자수정을 깎아 만든 듯한 눈동자. 청년의 유일무이한 사랑이 나른한 낯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현, 다녀왔어요.”
“어서 와. 춥지는 않았고?”

담요를 잡고 있던 손이 붉게 익은 뺨을 감싼다. 따스한 온기에 얼어붙은 피부가 녹으며 간질거렸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심장도 찬바람에 잠시 얼어붙었던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미세하게 기운이 없는 목소리를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염오는 하현의 손바닥에 제 뺨을 맞부볐다.

“이러면 당신 손도 금방 얼어붙을걸요. 벌써 차게 식었잖아요.”
“누가 예뻐해달라고 손을 안 놔줘서. 그리고 이 정도는 괜찮아.”

네가 다시 데워줄 테니까. 붉은 머리칼 앞으로 드리운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솜털처럼 가볍고 보드라운 입맞춤이 이마에 닿았다. 보고 싶었다는 작은 속삭임이 들린 것도 같다. 눈을 감았다 뜬 청년이 시선을 살짝 피한 채로 귀를 문질렀다. 그 익숙하고도 무의식에서 비롯된 버릇에 하현이 웃음을 삼켰다. 부담스러워서 그러나 싶었던 행동이 이제는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몇 번을 말해주어도 익숙지 않은지, 아니면 매번 비슷한 말을 들려주어도 처음인 것처럼 좋은지 그의 젊다면 젊고 어리다면 어릴 애인은 기쁜 감정이나 부끄러움을 감추려 드는 편이었다. 벅찬 마음을 미처 갈무리 하기도 전에 전부 들켜버릴지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감정을 능숙히 다루는 게 어른스러움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노력은 가상했으나 적어도 하현이 보기에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낑낑거리는 강아지와 다를 바 없던 탓에 그저 한없이 귀여울 따름이었다. 아마도 직접 말을 해주기 전까지는 스스로 깨닫지도 못할 테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가 있겠는가? 오로지 라하현만이 볼 수 있는 모습인 것을.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간다. 나뭇가지에 피어난 눈꽃이 화사하게 반짝였다. 식료품을 정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은 고요했다. 현관에서 골려 먹은 게 퍽 즐거웠던 모양인지 흡족한 낯으로 눈매를 휘던 하현 또한 소매를 걷어 올렸다. 겨울이 언제고 그에게 좋은 계절은 아니었지만, 비가 아닌 눈이 내렸고 좀 더 따뜻하게 몸을 녹이고 휴식할 시간이 있었기에 상태가 호전된 걸 테다. 칼질하는 순간에도 염오의 신경은 온통 하현에게 향해있었다. 호흡은 안정적인지, 통증을 참고 있는 건 아닌지. 유일한 후회였다. 그로 인해 어느 때고 심장이 요란스러웠다. 지붕 위에 내려앉은 까마귀마저 애틋하여 미칠 듯하면서도 양날의 단검을 맨손으로 쥐듯 아픈 것이 귀염오가 맞닥뜨린 사랑이다. 아침에 눈을 떠 제일 먼저 그를 볼 수 있음에 행복하다가도 제 손으로 입힌 상흔의 후유증을 참는 모습을 보면 깊은 수렁으로 굴러떨어졌다. 만일 라하현이 자신의 약함을 감추고 내색하는 걸 싫어하는 성정이 아니었다면, 귀염오 자신은 하루 종일 그 옆을 떠나지 않은 채 수발을 들려고 했을 터였다. 어쩌면 라하현 보다 그 상황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온전히 그를 책임질 수 있게.

“입에 맞아요?”
“실력이 많이 늘었네.”
“사사한 분이 워낙 뛰어나셔서.”
“그런 것 치고 감사하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그럼, 이제라도 할까요?”
“말로만?”

그럼 무얼 해드릴까요? 되돌아온 질문에 실소를 내비친 하현이 수저를 쥐었다. 지금도 밖에서는 무엇 하나 쉬이 입에 대지 않는 이가 음식을 삼킨다. 단순한 섭식 행위에는 어떠한 의심이나 경계심 또한 드러나지 않았다. 서로의 첫 만남을 상기한다면 현재는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생경하다. 그러나 무언가를 삼킬 때 만일을 가정하지 않게 된 것은 청년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느 때고 죽음을 감안하며 생을 연장해 왔다. 요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애초부터 누구도 귀한 핏줄에게 그런 사사로운 것을 익히라고 권한 적이 없었으니. 귀염오에게 요리는 단순히 적의 도움을 빚으로 남겨두기 싫어서 수락한 제안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리도 손이 많이 가는 행위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도, 누군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았을 때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그릇을 말끔히 비울 때 마음이 들뜬다는 감정도 처음 알았다.

“왜 그래. 입맛이 없어?”
“아뇨. 하현이 잘 먹으니까 좋아서요.”
“실없기는.”
“하지만 좋은걸요.”

청년은 그제야 제 몫의 양식을 챙겼다. 제멋대로 굴 것 같은 분위기와 달리 젓가락을 쥐는 모양새며 식사하는 태도 하나하나가 제대로 습관을 들인 사람의 정갈함을 드러냈다. 사실 세세히 뜯어보면 귀염오야 말로 도련님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인물일 터였다. 미처 가다듬지 못한 허술함. 마치 빳빳한 깃 속은 숨은 솜털을 매만지는 것 같이. 그럼에도 조심성 없는 섭식이 눈길을 끌었다. 서로의 진의와 패를 숨기던 시기에도 귀염오는 그래왔다. 그만큼 독에 익숙하다는 의미일 테지. 그 어렸던 아이는 무엇을 겪으며 자랐던 걸까.
라하현은 식탁 앞의 청년을 눈에 담는 걸 즐겼다. 자신이 먹지 않는 음식을 대신 맛있게 먹어준다는 만족감도 있었으나, 입에 맞는 걸 찾았을 때 묘하게 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눈동자라던가, 입가에 자리한 옅은 미소 같이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는 부분을 알아채는 순간이 즐거웠다. 특히나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할 때면 은근히 기대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지 않던가. 귀염오가 라하현에게 얼마나 무방비하고 스스럼없이 풀어졌는지 알게 되는 순간들이 차곡차곡 라하현의 마음에 쌓여 기쁨이 되었고, 어느새 기쁨은 필요가 되었다.

단둘이 살면서 귀염오가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스스로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다루기 시작하니 하루가 금방 흘러가 버린다는 점이겠다. 식탁을 치우고 미처 끝내지 못한 집안일을 마무리 하니 제법 시간이 흘러 있었다. 두 개의 잔 위로 고소한 찻잎 냄새를 머금은 김이 올라왔다. 실내조명을 낮추자 은은한 불빛이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운데 텔레비전에서 유명한 영화가 송출되고 있었다.
하현은 소파에 반쯤 누운 채 익숙한 동작으로 염오에게 팔을 벌렸다. 이제 그의 연인은 학라에서 처음 만난 시절보다 몸 선이 굵어졌고 약간의 단차를 보이던 눈높이도 어느새 동등한 위치에 다다랐음에도, 여전히 청년이 자신의 강아지라도 되는 양 무릎에 앉히거나 이런 식으로 품 안에 가둬놓고는 했다. 염오는 이 행동이 한 때 황룡회의 산주였던 자의 권위적 태도라던가, 하현의 소유욕이 아닐지 생각하고는 했다. 어쩌면 자신에게만 내어주는 특혜일지도 모르지만. 무엇이라 정의하든 서로 몸을 겹친 채 시간을 보내는 일과가 좋았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온 세상이 눈 속에 파묻혀 봄이 오는 날까지 둘만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호전되기는 했으나 한 번 떨어진 컨디션을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제 무게에 짓눌린 몸이 고통을 삼킬까 기울인 상반신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겨드랑이를 파고든 손이 등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내리뜬 시선이 마주치자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눈이 가늘게 호선을 그리는 동시에 염오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강하지 않은 힘이었다. 하지만 무방비해지는 주술에 걸린 것처럼 스르륵 기울어진 몸은 어느새 하현의 가슴팍에 뺨을 기댄 채였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굳어있던 몸이 완전히 이완되고 나서야 염오의 시선은 텔레비전을 향했다.
문화생활이란 일종의 위장이다. 이 말은 필요에 의해 습득할 뿐 그에 대한 호불호가 없다는 뜻이었다. 생존과 직결되는 위협을 벗어난 뒤에야 꽃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알 수 있다. 길을 벗어난 뒤에야 청년은 영화를 보는 게 꽤 재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알지는 못하지만, 전시를 보러 가거나 도서관에 방문하는 일도 즐거운 일 중 하나가 되었다. 정확히는 그 장소를 좋아하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일이 좋은 거였지만. 영화에 집중하는 동안에도 라하현을 의식한다. 저도 모르게 매 순간 당신이 선명하게 느껴진다고 하는 게 맞을 테다. 숨을 쉴 때마다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흉곽, 그 아래로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심장박동, 입욕제와 담배 잔향이 뒤섞인 체향. 금방이라도 단잠에 들 것처럼 나른하다. 온갖 좋은 것들을 한데 모으면 라하현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이따금 등을 토닥거리던 손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척추를 따라 배부를 슬슬 문지르는 움직임에 발끝을 움츠렸다. 머리칼 사이로 파고든 손이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오소소 돋은 오싹한 감각을 무시하려 눈을 감았을까. 자연스럽게 귀를 문지르는 손길에 움찔거리며 몸이 반응했다. 고개를 들자 자못 즐거워 보이는 시선이 청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자 낑낑거리며 참고 있던 것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텔레비전 속에서 연인이 격정적인 입맞춤을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부끄러워할 새도 없이 턱 끝을 붙잡은 손과 함께 부드러운 자극이 입술에 내려앉았다.

짧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다시금 맞물렸다. 입술을 깨물고는 혀끝이 그 자리를 짓누른다. 호흡이 뒤섞였다. 아릿한 통증이 가라앉으며 관능을 자극한다. 점막에 닿은 자극에 등골을 타고 오싹한 감각을 남겼다. 낮은 신음이 목구멍을 울리자 투명한 실처럼 타액을 늘어뜨린 입술이 다디단 숨을 내쉬었다. 불이라도 옮겨붙은 듯 들뜬 열기가 하현에게 애정을 남겼다. 이마, 눈두덩이, 뺨과 코끝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은 입맞춤, 그리고 미처 성급함을 누르지 못한 손길이 목덜미부터 꼭꼭 걸어 잠근 매듭단추를 푸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맞닿은 하반신이 수 겹의 천을 사이에 두고 마찰한다. 하현 또한 상대방을 벗기고 싶은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단단한 복근이 만져졌다. 칼을 맞고 아문 흉터와 어느 과거에 생겼을 크고 작은 상흔. 어쩌면 학라에서 생겼을 생채기까지. 손끝으로 하나하나 그의 시간을 더듬자 간지럽다는 듯 움츠러든 몸이 라하현을 보았다. 어쩐지 명령이라도 내려야 할 것처럼 집중한 모습에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을까, ‘벗어.’ 입 모양만으로도 그의 사랑스러운 애인에게는 충분했을 테다.

흰 피부를 타고 떨어지는 붉은 머리칼이 보기 좋게 찰랑인다. 허투루 관리하지 않은 몸은 해가 지날수록 농익은 매력을 보였다. 목덜미에 닿은 숨이 피부를 간질인다. 깨물듯 말듯 입질을 고민하던 입술이 가벼운 입맞춤만을 수차례 남겼다. 타액에 젖은 손가락이 천천히 밑을 파고드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현이 깊게 들이쉰 숨을 천천히 내쉬자 염오가 고개를 들었다. 달아오른 얼굴에 갈망이 엿보였다. 날이 갈수록 요망함도 늘어나는지 제 입술에 쪽, 하고 입맞춤을 남긴 그가 샐쭉 웃고는 가슴을 탐했다. 쇄골을 타고 입맞춤이 이어지더니 혓바닥으로 유두를 할짝댄다. 꼿꼿이 선 유두 주위를 빙그르르 돌고 혀끝이 유두를 콕콕 찌르는 감각이 간질거렸을까, 유륜까지 한 움큼 문 채로 빨아당기는 자극에 반사적으로 허리를 들썩이자 내벽을 문지르며 빠져나간 손가락이 이번에는 두 개로 늘어났다. 굳은살과 흉터로 거친 피부가 오히려 오싹한 쾌락을 떠안긴다. 염오의 어깨를 꽉 쥐자 깊숙이 파고든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춘 채 안쪽을 벌리는 감각만이 느껴졌다. 넘칠 듯 말 듯 물결치던 쾌락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하현, 괜찮아요? 힘들면 그만할까요?”
“…… 아니.”

턱 끝에 입맞춤을 남긴 목소리는 걱정이 담겨있었다. 아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해도 귀염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림새를 정리해 줄 터였다. 그런 부분을 알기에 믿을 수 있는 거라고, 하현이 염오를 끌어안았다. 맞붙은 뺨을 통해 빠르게 맥동하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네 걸 넣어줘.”

숨을 가다듬는 소리만이 귓가를 맴돈다. 활짝 벌어진 다리가 염오의 허리에 감겼다. 소파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이 검은 비단을 깔아둔 듯 광택을 머금었다. 쾌감을 참는 모습조차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들 수 있을까. 조금 더 몰아가고 싶은 욕망이 들다가도 당신이 그어둔 선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저울처럼 기우뚱거렸다. 염오는 하현의 손가락 마디마다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손바닥의 가장 오목한 자리에 입술을 묻고, 손목에도 도장을 찍듯 입술을 댔다. 할 수 있다면 라하현의 몸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 발밑에 조아리고 발등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었다. 사실 요란스러운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패배라는 감정을 받아들였다. 귀염오는 결코 라하현을 죽이지 못할 것이다. 그를 죽이느니 바라는 대로 따를 거라고. 지금도 그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살갗이 마찰하는 소리, 낮고 탁한 신음이 새어 나온다. 느릿한 움직임에 흠칫거리는 몸이 아래를 꽉 조여 물었다. 하얗게 번뜩이는 쾌락에 숨을 삼키자 신음 섞인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무슨 생각해?”
“당신 생각이요.”
“눈앞에 있는데도?”
“있어도 없어도 당신 생각뿐인걸요.”

자수정을 깎아낸 듯한 영롱한 눈동자가 붉은 머리칼을 담는다. 그 속에 담긴 크고 무거운 감정은 항상 한 사람에게 향했다. 귀염오는 이제 당신의 가슴속에 얼마나 깊은 사랑이 담겨 있는지를 안다. 그럼에도 종종 생각한다. 당신은 정말로 만족하냐고. 더 이상 귀한 천으로 지은 옷을 걸치지 않고, 고급 담배를 피우지 않고, 독특하면서도 위험한 향기를 두르지 않는 삶을 살아도 당신은 괜찮겠냐고. 그 모든 부귀영화와 권력을 정말로 내려놓은 채 이렇게 살아도 되겠느냐고. 과분한 애정 속에서 일말의 불안을 만든다. 제 마음이 온 생애를 통틀어 너무나 커져 버린 탓에, 그러나 그 마음마저 당신이 주는 것에 비하면 보잘것없고 부족해 보인 탓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당신에게는 꼭꼭 숨겨 알려주지 않을 테다. 그저 지금은.

“하현, 입 맞추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아까는 잘만 했으면서.”
“그래도요.”

깃털과 같이 가볍고 짧은 허락에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당신을 사랑해요.’ 수십 번 내뱉었을 고백을 천 번의 밤이 흐르는 오늘도 당신에게 바친다. 이 삶이 더 이상 두렵지 않으니까. 라하현이라는 사람과의 시간이 소중하니까. 어떤 끝에 다다르더라도 나의 처음이며 끝을 당신에게 줄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이 불안조차도 달콤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지나면 눈에 파묻혀 무엇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새하얀 세상에도 어둠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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